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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큰 아저씨의 보약 같은 이야기
할로윈? 죽은자의 날 영화 '코코(Coco)'와 우리나라의 매장풍습에 관한 내 생각 본문
지난 할로윈에 이런저런 기사들과 유튜브 동영상에 외국의 축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 보았다. 그 유래에 대한 이야기중 '죽의자의 날'에 죽은이들을 위한 축제와 기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째서 인지 '부상국'이라는 말도 스멀스멀 검색이 되는 마당에 나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인디언' -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멕시코, 브라질 원주민들의 생김새가 낯설지가 않았었다. 검은 머리도 그렇고 넙대대한 얼굴이나 눈의 생김이나 강냉이, 콩등을 좋아하는 식성이나 사냥하는 습성이나 늑대나 호랑이 곰등을 숭상하는 문화나 어딘가 모를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죽은자의 날에대한 영화'코코'를 통해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제사'라는것은 우리나라 문화에서 명절과 함께 조상에대해 제를 올리는 뜻 깊은 풍습이었다. 관혼상'제'에서 '제'라함의 근본정신은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고 경모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지금도 많은 가정에서 제사를 지낼것이지만 우리집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제사를 잘 지내지 않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기독교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제사라는것은 신에게 조상에게 왕이나 제사장이 지내던것이 어느때부터 누구나 당연히 '해도되는'것이 되어서 이젠 '가문'이라고 할만한 이들은 다 하는 것 이되었는데 이젠 서양의 종교가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여 '기도'로 대체하게 했다. 나는 제사나 기도나 어느것도 좋다는 입장이라 큰 문제는 없지만 '매장문화'에 대해서는 한번 글을 써보고 싶었다. 뭔가 요즘의 흐름은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전에도 묻어왔고 앞으로도 묻기를 바라는 입장이라는 것 만은 미리 글로 남겨두고 싶다.
사람이 죽는다는것. 잊혀진다는 것. 그것은 '기억된다'는것과 첨예한 반대입장이다. 그런점에서 영화 '코코'는 그 바탕에 깔려있는 멕시코의 문화를 잘 표혔을을뿐 아니라 스토리 또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모든 살아있는것은 결국 정해진 만큼의 수명을 다하면 죽는것이지만 나무가 씨앗을 남기듯 인간도 자손을 남기고 죽어가는것이 일반적이다. 나무는 결국 땅의 양분이 되어 다시 식물과 동물의 양분이 되지만 인간은 더이상 땅의 일부가 되길 거부하는듯하다. 태워서 뿌려 일부가 된다 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다. 그것도 어쩌면 일부가 되긴 하는걸까?
화장이라는것. 간단히 떠오르는것은 불교에서 태운다는것과 전쟁이나 전염병이 돌았을 때 사람을 태운다는것 유럽의 바이킹들은 죽은자를 태운다는 것 정도다. 나는 얼마 전까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얗게 태워 물에도 뿌리고 나무에도 뿌리는것에 대해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입장이었는데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 모든것이 처음부터 하나하나 생각해볼 문제가 되어지기 시작했다.
고인돌은 전세계적으로 퍼져있는 매장 양식이겠지만 우리나라에 특히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고 알고 있다. 죽은자에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우린 그 주검을 땅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그게 가까운 사람이라면 표시를 하여 가끔 찾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하다못해 키우던 개나 고양이가 죽어도 땅으로 돌아가라고 묻어주며 다음생엔 더 좋은곳에 태어나라고 말을 해주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람이 죽었는데 묻을 자리가 없다며 태워 항아리에 넣는것이 당연해 졌다. 나는 그것이 점점 나에게 다가올 미래라는것에 어느순간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40년쯤 이 땅에서 살아보니 참 살기 좋았다 말하고 싶다. 하필이면 내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를 만나 참 너무나 호사스런 인생을 살았구나 싶다. 충분히 사랑받았고 더 필요한것이 없을만큼 누렸다고 생각한다. 더이상 어떻게 좋을 수가 있을까 싶을정도로 고맙고 감사한 생이었는데 이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나이를 드시니 점점 겁이 나는 것이다.
아버지는 조상님들이 묻혀있는 선산에 모셨지만 어머니는 같이 태우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 형제들은 아들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다음에 누가 산소를 모실것인가 말이다. 알다시피 딸들은 조상을 모시지 않기 때문이다. 외가의 제사를 지낸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다.
과거 몽골이나 흔히 말하는 '에스키모'들 초원의 사람들은 장남이 성인이 되면 키우던 가축의 절반을 주어 동쪽으로 새로운 땅을 찾아 보냈다고 한다. 둘째가 성인이 되면 또 남은 절반을 주고 그렇게 자식들을 분가 시키다가 막내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고 했다. 어쩌면 아메리카 원주민과 멕시코, 브라질의 원주민들이 우리와 닮은 모습인것은 살짝 짐작이 가는 이야기 아닌가. 옜날에는 알래스카가 많이 얼어 붙어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인디언-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면 영화같은곳에도 나오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다. 그들도 '조상신'에게 감사하며 살아왔다.
죽은 조상들과 만난다는 마음 편안하고 가슴찡한 이야기가 나에게 어째서 이렇게까지 울림이 있는것인지... 유튜브에서 코코의 '기억해줘'를 찾아보다보니 댓글에 '나도 울었다'는 글들이 많이 보였다. 나만 그런것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에겐 정이라는것이 있지 않은가말이다.
사람이 나이를 들어 생기를 잃고 주글주글한 얼굴로 멍하니 먼 산을 보고 있으면 '노인'을 '꼰대'니 '틀딱'이니 요즘엔 참 몹쓸 말들을 많이도 만들어 내는것에 큰 한숨이 나온다. '근본'을 모르는 '철없는 것들' 로 보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늙어질 것이고 누구나 젊을때가 있었고 죽고 다시 태어나야할 인생인데 한참 부족한 이들이 아닌가 말이다. 지나온 세월만큼 알아야할것이 산더미같이 많은데 다 전할 수가 없는것이 아니겠는가...투머치토커라고 피하지 않느냔 말이다. '또 시작이다'라며 피해버리니 그 숱한 '역사'와 잊혀진 '이야기'를 '일본'처럼 적어두지 못하고 요즘 나처럼' 왜 우리나라는 역사 자료가 이렇게 없나'라며 언젠가는 분명 후회할 것이다. 혹시 아나 우리나라에 역사적 자료가 다른나라 보다많이 없는 이유가 '한때 유행'으로 다 태워버렸는지...
몇 해 전 유럽의 '카타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적이있다. 그것을 보고 나는 단번에 '아!' 하며 그들이 다른 나라보다 '우월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어머니를 따라 기독교 집안이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고 불교의 '윤회'또한 관심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 과학적 원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씨앗을통해 같은 종의 수를 늘려 나간다. 어떤 민둥산에 하나의 은행나무가 있다고 치자. 그 나무는 오래오래 살면서 씨앗을 뿌려 그 산에 수많은 은행나무를 퍼뜨렸다고 생각해보라. 비록 그 처음 나무가 비바람에 쓰러졌다해도 다른 은행나무가 얼마든지 있으니 그 은행나무는 '살아있는것'이다. 그것이 내가 인정하는 '윤회'인 것이다.
아버지를 닮은 자식은 많지 않다. 하지만 어머니를 닮은 자식은 많다. 성씨를 타고 올라가봤자 나와 내 시조와는 그닥 DNA가 많이 섞여 있지는 못할것이지만 외가쪽으로 가면 다르다. 왜냐하면 나는 외삼촌들이나 외할머니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일뿐 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내가만약 A라는 컴퓨터를 조립했다 치자. B라는 컴퓨터를 A와 똑같은 사양으로 조립했다고 해서 A와 B는 하나의 컴퓨터는 아니지만 '동일한' 두개의 컴퓨터임에는 틀림이 없다. 내용물은 다르지만 형식은 동일한것이다. 누군가 '너 윈도우 컴퓨터를 쓰냐 맥을 쓰냐?'라고 묻는다면 '윈도우를 2개 쓴다'로 말을 할 것이다. 시스템이 동일한 두개의 하드웨어. 하드웨어가 같다면 소프트웨어도 호환이 된다.
나는 그렇게 '우리가족'이 되고 '우리동네'가되고 '우리지역'으로 뭉치고 '우리나라' 로 '우리민족'으로 점점 커져 '동양인'으로 '황인종'으로 결국엔 '인간'으로 소속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최소한의 단위가 되는 가족. 피를 직접적으로 나눠가진 '가족'이야말로 두개로 나뉘어진 '플라나리아'처럼 부모와 자식은 본디 '한 몸'이라고 했을 때 넓게 봐서 '우리'는 하나인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죽어 태워진다거나 설마 '조장'이나 '화장' 또는 '수장'을 한다면 몹시 슬플것이다. 비록 시신이 되어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부모를 잊고 자식을 만나지 못한다는것.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와 다를것이 무엇인가. 흔히 말하는 '끈떨어진 연'과 같고 ''무연고'의 '고아'와 무엇이 다른가말이다. 죽은자도 그렇지만 남은사람말이다.
불교의 스님들은 그렇다 쳐도 된다고생각한다. 속세를 버린 그들은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자식'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자식 그중에 '아들'이 있다면 제사나 '매장'은 중요한 풍습이라고 생각한다. 여태것 아주 오랬동안 그래왔기 때문이다. 요즘사람들이야 자기가 엄청 똑똑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왕'이나 '대통령'이나 일가를 이룬자들이나 제상이 되었던 자들이 '화장'이 아닌 '매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것이다.
자기들은 풍수지리까지 따져 좋은자리에 묻히면서 남들에게 '이 좁은 땅덩이에 묻는게 얼마나 낭비냐'며 화장을 권하는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느 머리좋고 부자가 되고싶은 땅 좀 가진 사람이 '납골당' 장사를 위해 홍보를 한것이 잘 먹혔는지도 모른다. 부자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가. 남의 재산이 나에게 오면된다. 땅부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남의 땅이 내것이 되면 되는것이다. 내가 땅에 묻히는 방법으로 '남을 태우는'것을 누군가 조장하는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중이다. 우리나라엔 '약은'사람이 넘쳐나니 말이다.
우리나라는 항상 '땅'에 민감했다. 항상 '땅'은 돈이 됐다. 그런데 사고 팔아 '돈'을 만들어야하는 그곳에 '무덤'이 있으니 골치가 아픈 사람들이 있었을것이다. 그들은 함부러 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무덤'에 관한 법 때문에 짜증이 났을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납골당'같은 아파트식 무덤은 얼마나 '돈'이 되었겠는가. 공원묘지도 만들고 덕분에 여기저기 산마다 넘쳐나는 '무덤'도 한곳으로 옮기고. 과연 정작 그들이 죽으면 그곳에 들어갈까? 그런생각이 든다.
내가 굳이 이런글을 쓰는 이유는 '매장'문화를 보편화하여 나도 덕분에 어느 구석에라도 묻혀 나중에 내 자손들이 힘들고 지쳐 어디 찾아가 기댈곳도 없을때 그 영혼의 뿌리까지 흔들려 어디로 흘러가야할지도 모를 때 내 무덤. 조상의 땅을 찾아보고 어디에서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게 된다면 자신의 '근본'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예를 들어 이런것이다. 수능을 망쳐 죽고싶다거나... 사는게 힘들고 지쳐 그만하고 싶다거나 할때 자존감이 낮아 누가 때려도 그냥 맞고 있을때 에이 '나같은게 아무렴 어때'라는 생각이 들 때 그런 때 자신이 이세상에 있기까지 대체 몇 만년의 태어남이 반복 되었던것인지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한다는 것이다. 바다에서 생명체가 생겨나 뭍으로 기어나와 돌아다니다가 파충류가 되고 알을 낳다가 탯줄로 자식을 낳고 두발로 걷고 맘모스와 싸우고 호랑이를 피해 동굴로 숨어들기를 몇 수만년을 이어온 생이냔 말이다. 그 숱한 전쟁과 질병과 가난과 배고픔을 이겨내고 억울함을 잊고 서러움을 이겨내고 끝없는 시련과 좌절을 버텨내며 살아오다 어쩌면 이렇게 훌륭하고 멋진 세상을 사는데 고작 한두번의 시련에 지나고 나면 기억도 잘 나지 않을 그런 하찮은 일들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조상들이 간절히 바란 '자식의 행복', '생의 이어짐'을 잊고 생을 포기하는 미련한 짓을 하겠느냔 말이다.
팔만 대장경같은 민족의 엄청난 유산을 어느 철없는 아이가 한순간에 아무 생각없이 '난 필요 없는데? 이거 내껀데? 내맘대로 하면 어때' 하며 다 태워 버린다면 딱 그런 비유가 적당하지 않을까? 잠깐 보고 다음 사람에게 전달해야할것을 내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 태워버리는 사람들이 분명 많이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했다. 싸움에서 이긴놈이 다 날조한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이기려면 '정신'에서부터 뒷받침이 있어야 할것같다. 뭐 하나라도 '카드'가 있다면 '게임'에서 이길 확률이 포인트라도 늘지 않겠는가.
어느집안 몇대손이다. 하는 배경. 그것으로 결속될 '종씨' , '가문', '혈연', '지연' 내가 생각하는 단합은 이나라의 누군가에게는 어떤 때에는 잘 써먹을만한 '구실'이 되었고 어떨때는 가지지 못한사람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자'쪽이지만 최소한 무엇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대해 생각해 보고 짚어볼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고아'가 있다고 예를 들어보자. 그가 비록 '부모'가 없다고 한다면 그에게 가족과 뿌리를 소중히 하는 '삼촌', '고모', '사촌', 하다못해'6촌', '8촌'이 있다면 어떨까. 사업을 할때 우리가 가장 흔하게 묻고 따져보는것이 무엇인가. '어디출신이요?' '아하! 나도 거기요' 아닌가 말이다. '그 학교 나왔습니다.' 같은 소속감. 동질감은 하나의 생존 무기가 될 수 있지않느냐는 말이다. 어떤 영화에서' 내가 마 늬 서장이랑 마 술도 먹고 싸우나도 가고 마! 다 했어임마!'처럼 조상의 무덤이라는것이 마냥 짐으로만 생각한다면 당신은 생각이 얼마나 짧은지 이 글을 읽고 한번쯤 생각해 보라.
선산에 금초를 가서 만나게되는 대체 몇촌인지도 모를 먼 친척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4촌, 6촌, 8촌 정도는 보잖느냔 말이다. 결혼한다고 할때 누군가의 초상에 서로서로 힘이되고 위로가 되고 그렇게 살아온 우리가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외국식 개인주의가 가져온 '납골당'이라는것으로 작은 단위로 쪼개져서 다 잊는다면 나는 그것을 '인적재산'을 포기하는것과 같다고 본다.
이 나라는 한때 벗겨먹을 나무 껍질도 캐먹을 풀 뿌리가 없어 굶어 죽은 사람이 추위를 이겨낼 비를 피할 지붕하나가 없어 얼어죽은 사람이 길가에 개천에 널려있던 나라였다. 그럼에도 콩한쪽 쌀한톨도 나눠먹으며 '우리'라는 끈으로 묶여 지금까지 서로 지켜주며 끌어주며 서로 울타리가 되어주며 이만큼 온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울타리'는 감옥라 말하고 '밀어주고 끌어주는'것은 '간섭'이 되고 '가르침' 은 '훈수질'이 되어버린걸까... 참 안타깝다.
당신이 쉽게 태워지길 바란다면 그 많은 인연의 끈을 포기하는 것인데 다 크지도 않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에게 한번 물어는 보고 그렇게 하느냔 말이다. 문화라는것은 다수가 가는길을 따라가는것이기도 하지만 '해오던것을 지켜가는것'또한 한번쯤 생각해 보도록 했으면 한다. 내가 당신이 결정하지 말고 어떻게 할지는 다음 자식에게 '선택'할 수 있도록 넘겨주는것 에서도 한번 쯤 생각해 보란 말이다. 그게 '짐'일지 '복'일지는 그들이 그 때에 판단하고 선택해도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프랑스 시내 한 복판에 지하로 내려가는 그리스 시대의 '카타콤'의 입구가 있는데 그 나라는 유럽의 한 복판에 있다는것을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역사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지금에 대해. 우리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봤으면 한다.
자식을 많이 낳고 그들이 이 땅에서 '번영'하기를 원하는 '조상'이 되고 싶다면 우리 조상들이 해 왔던것처럼 '매장'을 통해 자식들의 '화합'과 '결속'을 다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가르쳐야한다. 하나의 화살은 잘 부러지지만 세개의 화살을 한데 뭉치면 한번에 부러지기 쉽지 않다는것을. 그처럼 너희들도 서로 화합하고 교류하고 왕래하며 뭉쳐야한다는것을말이다.
영화 '코코'의 마지막 장면을 올리며 끝마치고 싶다. 이 영화를 통해 '남'과 '여' 가 아닌 '우리', '가족'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재단에 사진들을 놓을 때 누구의 사진이 들어가는지 보면 될것 같다. 그러니 제사에 대한 딴지는 사절한다. 내 생각이니 말이다. '남' 과 '여'의 싸움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다음 글에 한번 꼭 쓰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부모를 그리워하고 자식을 사랑하며 살다 간다.
그것이 탈 없이 반복되어야 보통의 무난한 인생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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